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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우 컬럼) 이타주의 (利他主義) (2)

 

[페어뉴스]= 본디 이타주의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태초부터 창조주의 의도하심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도 그런 것은 누군가 그 내용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논리가 형성되었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사(人間事)에 있어서 풀어야 할 문제나 풀리지 않는 숙제까지 포함된 그 해답은 창조의 내용들 속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출발된 이타주의의 내용에 담겨져 있는 근본적인 내용이나, 혹은 왜 그렇게 하여야만 되는지에 대하여 알려면 창조목적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사전적 ‘자연’의 핵심 가치를 정의하면 이렇다. “무궁한 진리의 물질적 표현으로서 인간의 경험 대상의 전체, 혹은 사람과 물질의 고유성, 혹은 본연의 이치, 또는 인류 이외에 있는 외계의 온갖 물질”이라고 정리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의 발에 짓밟힘을 당하면서 까지도 순전히 인간을 위하여 희생하는 생물이나 심지어는 무생물들이나 잡초도 우리 주변에는 수두룩하다. 사람의 이익만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고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성이 강한 약물을 동원하여 씨를 말리려고 하여도 끄덕하지 않고 끈질기게 길거리에서 돋아나는 이름 모를 잡초도 창조주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다. 그런가 하면 고등동물이나 하등동물도 그 분의 작품임과 동시에 피조물이다. 심지어는 하루 동안만 살다가 죽는 하루살이도 그 분의 작정하심에 손길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들을 왜 그렇게 지으셔야만 하셨고 그렇게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동물과, 식물들을, 심지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을 지으셨는지 그 이유를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또한 자연계가 순환적으로 운용되는 체계도 그렇다. 매연으로 뒤덮여 있는 대지가 하루 밤만 지나고 나면 원상태로 깨끗하게 정화되는 과정이나 그 방법까지도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자연계의 순환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지만 질서정연하게 순환되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의 방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맺으면서 쉼 없이 반복하며 창조주의 목적하신 목적지를 향하여 서서히 진행되어 간다. 서로가 팽팽한 긴장감은 있지만 서로 충돌하지도 않는다. 

시편 29편 1~9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창조주는 인간사나 자연계를 엄하게 다스리신다. 왜 그렇게 하셔야만 하시는지 우리로서는 그 이유도 알 길이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악(惡)을 억제하시고 선(善)을 장려하신다. 심지어는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산림을 말갛게 벗기시기도 하신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여야만 하는 이유나 푸르른 산들을 민둥산이 되게 하시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 다만,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만물이 그 분의 통치범주 안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창조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그렇게 하셔야만 하실 이유가 있으실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창조하신 내용들을 이것저것,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면서 유심히 관찰하여보아도 이타주의는 순전히 창조주의 의도하심이고 속성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을 받은 사람을 비롯하여 우주만물들이 상생과 공생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창조주만의 유일한 수단이다. 때문에 이타주의의 상호(相好) 공생혜택은 인간과 인간으로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도 혹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만물과도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이기주의적인 행동으로 파괴된 자연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저들 스스로 자연스럽게 복원된다. 인간이 아무리 자연을 파괴하려고 하여도 자연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복원되고 유지되는 원리를 살펴보면 왜 이타주의이어야 하는 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자연은 크게 인간과, 식물과, 동물들로 구성되어 정하신 이치에 순응하며 운용되며 번성하면서 지속성을 유지한다. 만일 인간의 인위적인 행동으로 이 운용의 체계나 규정이 흐트러지거나 손상을 입게 되면 심각하게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되어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다. 요사이 절감하고 있지만 예를 들면 자연재앙 같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순리는 멈추지 않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노도(怒濤)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목적지를 향하여 진행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바다에서의 먹이 사슬의 첫 단계는 플랑크톤(plankton)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땅에서 먹이 사슬의 첫 단계는 사람이 양식으로 삼기 위하여 심어 자라는 식물이나 작물이 아니라 척박한 곳에서 자생하는 잡초들이다. 인간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독한제초제를 뿌려 말살 하려고 하여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다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인사를 한다고 하여 잡초라고 부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이름조차도 모르는 풀이라서 하찮은 것 같지만 이 먹이 사슬의 기초가 유지되지 않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다. 

산이나 들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은 한곳에 여러 종이 함께 어우러져 오순도순 살아간다. 그들은 그들만의 유익을 얻기 위하여 자의적 선택에 의하여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여러 종이 한자리에 모여서 살아간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내가 이곳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머물러 있는 그곳이 싫다고 하여서 그 자리를 박차고 다른 곳으로 쉽게 훌쩍 떠나지도 않는다. 내가 너희를 도와주지 않으면 너희는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밖에 없다고 협박성 엄포도 하지 않는다. 녀석들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엄격하게 표현하면 상대방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것이 곧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에 익숙하여져 있지만 식물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어떤 종류이든지 두 팔을 활짝 벌려 환영하고 포용한다. 서로 공생하기 위하여서는 공존의 관계를 유지하여야만 되기 때문이다. 

자연 질서 속에서도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도 서로를 위하여 존재한다. 이 원리가 설득력이 빈약할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살면서 독식하면 모든 것이 여유롭고 풍족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 혼자만 있으면 내 차지로 더 많은 것들이 돌아올 것 같지만 이도 역시 부질없는 짓이다. 움켜쥐면 더 풍요롭게 살 것 같지만 이 또한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분량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 하루 세끼로 족하다. 이쯤에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인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던 이솝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린고비”의 좁은 안목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면 어떤 것이든지 함부로 낭비하지 않고 부자가 되기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예화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침샘을 자극할 정도로 숯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어 밥상에 올려 반찬으로 먹어야 할 굴비를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밥 한술 입에 넣고 굴비를 바라보고, 밥 한술 또 입에 넣고 굴비를 또 한번 바라보면서 맨밥을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의 씁쓰레한 얼굴표정을 머리에 연상(聯想)하여 보라.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아등바등 거리면서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2019년 WFP(유엔 산하기관인 유엔세계식량계획)의 통계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식량 40억t 중 3분의 1은 손실되거나 낭비되고 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연간 1조 달러(약 1천200조 원)이 낭비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음식물 낭비가 심각한 수준이어서 환경부에 따르면 하루 1만 5900t(2017년 기준)의 음식물 쓰레기가 배출된다고 한다. 음식물쓰레기의 70%는 가정과 소형 음식점에서 배출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20조 원 이상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며 음식물 처리비용은 8천600억 원이나 된다고 한다. 관리 부실로 인하여 멀쩡한 음식 재료가 버려지는가 하면 혹은 먹다 남은 음식이 버려진다. 심지어는 포장도 개봉하지 않은 채로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편에서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도 많다. 많이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함께 나누면 굶는 사람도 줄어 들뿐만이 아니라 부족하지도 않다. 창조주는 만물을 지으실 때 거기까지 염두(念頭) 하여 두셨다. 순전히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개인적인 논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개인적으로는 풍요롭고 위대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창조주의 의도하심인 이타주의의 논리로 보면 그도 역시 부질없는 짓이고 그렇게 크게 의미도 없다. 인간이 결국 돌아가야만 하는 길은 이미 정하여져 있다.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라 태어나게 하셨고 언젠가는 죽도록 정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한번 태어나고 죽는 것은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다르지 않다. 누구는 누구보다 모든 면에서 더 월등하기 때문에, 누구는 돈을 태산처럼 많이 쌓아 놓고 평생을 배불리 먹고 근심걱정 없이 살았던 덕분에 세상을 호령하는 지위에 있었을지라도 그분이 정한 이치를 비켜 갈 자가 누군가? 

창조주 앞에서는 자신만을 위하여 태산같이 쌓아놓은 업적도, 혹은 치적(治積)도 그렇게 크게 의미가 없다. 누구든지 자신이 의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창조주가 정한 이치에 따라서 갈 곳은 오직 한곳뿐이기 때문이다. 그냥저냥 그렇게 왔다가 그럭저럭 그렇게 인생의 마지막을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것뿐으로만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유심히 눈여겨보아야 할 죽음의 핵심가치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많고 적음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한 순간에 평등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고양시 빛무리교회 목사
고양시 반딧불도서관 관장
고양시 자원봉사센터 자원봉사활동 교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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